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평가 (문단 편집) ==== 회남의 중요성? ==== 일단 회남이 없을 때 유수구가 뚫리면 곧바로 수도를 노릴 수 있다는 말은 과언이다. 둘 사이에는 장강이 존재한다. 장강 하류는 바다와 다를 바 없을 정도의 폭을 자랑한다. 이를 단순히 강을 건너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할 때 수도를 직격한 것? 당시 강릉은 수나라의 괴뢰 정권인 [[후량(남북조시대)|후량]]의 영토였다. 그렇다고 수도 직격만으로 진나라를 정벌했나? 그것도 아니다. 영안, 양양, 강릉 등에서도 동시에 군대를 움직였다. 애초에 수나라가 사천, 강릉, 양양, 회남을 모두 장악하고 있던 시점에서 펼친 원정을 손오 정권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무리이다. 회남을 잃었을 때 북쪽 정권이 남조의 수도인 건강으로 직격하는 것을 장강이 건너기 쉬워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수도를 직격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북조가 회남을 장악한 시점이면 높은 확률로 국력에서 남조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남과 형주를 비교해 보았을 때, 형주의 중요성이 훨씬 높다. 상술했듯이 회남-양주는 장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형주-양주는 장강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싸워야한다. 역사적으로 회남 없이 버틴 남조 정권은 있었으나 형주 없이 버틴 정권은 없었다. >春,正月,張永等棄城夜遁。會天大雪,泗水冰合,永等棄船步走,士卒凍死者太半,手足斷者什七八。尉元邀其前,薛安都乘其後,大破永等於呂梁之東,死者以萬數,枕屍六十餘里,委棄軍資器械不可勝計;永足指亦墮,與沈攸之僅以身免,梁、南秦二州刺史垣恭祖等為魏所虜。 >'''467년 봄, 정월''', 유송의 장수 장영 등이 밤에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폭설을 맞아, 사수의 얼음이 합쳐졌기에, 장영 등은 배를 버리고 걸어서 도주했는데, 사졸 중에 얼어죽은 자가 태반이었고, 수족이 끊어진 자가 7~8할이었다. 북위의 장수 울원이 그 앞에서 맞이했고, 북위의 장수 설안도가 그 뒤를 꾀하여, 여량의 동쪽에서 장영 등을 대파시켰고, 죽은 자가 만여 명에, 드러누운 시체가 60여리에 걸쳤고, 버린 군자와 기계가 셀 수 없었다. 장영도 발이 떼어졌고, 유송의 장수 심유지와 더불어 겨우 몸을 건졌고, 유송의 양, 남진 2주자사 원공조 등이 북위에 잡혔다. > >上聞之,召蔡興宗,以敗書示之,曰:「我愧卿甚!」永降號左將軍;攸之免官,以貞陽公領職還屯淮陰。由是失淮北四州及豫州淮西之地。 >황제가 이를 듣고, 유송의 장수 채흥종을 불러, 패전의 서신을 보이며, 말하기를, "나도 괴롭지만 경은 심할것이오!" >장영은 좌장군으로 강등당했고, 심유지는 해직되어, 정양공으로서 영직하여 회음으로 돌아와 주둔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회북 4주에서 예주의 회서에 이르는 영토를 상실했다.''' > >(중략) > >秋,八月,乙酉,勰部分將士,與永並勢擊伯之於肥口,大破之,斬首九千,俘獲一萬。伯之脫身遁還,淮南遂入於魏。 >'''500년 가을, 8월''', 을유일, 북위의 친왕 원협이 부곡의 장수와 병사를 나누어, 북위의 장수 부영과 더불어 나란히 기세로 남제의 장수 진백지를 비구에서 쳐서, 대파시키고, 9천 급을 참수하고, 1만 명을 포획했다. 진백지는 몸을 빼서 도망쳐 돌아갔고,'''회남이 드디어 북위의 영토로 들어갔다.''' >----- >『자치통감』 中 동진의 경우 화북 지역이 사분오열된 상태로 조위가 화북을 통일한 삼국시대와는 큰 차이가 있다.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침공을 비수에서 막아낸 것도 일회성 사건이지 장기적으로 대치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본격적으로 남북의 대치가 일어난 것은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이후이다. 남조가 북위에게 회북을 상실한 것이 467년, 회남의 상실은 500년으로 회수를 기준으로 버틴 시간은 '''약 33년'''이다. 그 이후 [[육진의 난]] 당시 [[양(남조)|양나라]]의 [[진경지]]가 북벌을 감행했지만 [[이주영]]에게 패했고 [[북제]]가 멸망할 때 다시 올라가면서 일진일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회남을 완벽히 장악하고 요새화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수나라]]한테 [[진(남조)|진나라]]가 멸망한 것이 589년이니 '''약 89년''' 간 장강 하류가 방어선이었다. 물론 북위에서 내분이 일어나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고 북제와 북주로 이어진 것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손오 정권이 강릉을 얻은 후 멸망까지 '''61년'''을 버텼으며 조비의 1차 남정을 기준으로 해도 '''57년'''을 버텼다. 남조가 회남을 상실했을 때는 형주를 소유한 상태였다. 형주까지 있었음에도 33년만에 회남을 잃었다. 형주가 없었으면 더 빨리 잃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위에서 회남을 소유해 본 적이 있다고 언급된 진나라는 32년만에 망했다. 남북조시대에는 회남에서 일진일퇴하는 국면이 다수 보인다. 회남을 확보하는 것은 상술했듯이 수도인 건업/건강의 방위를 위해서이지 수비가 쉬운 지형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북쪽에서 회수로 합류하는 지류들은 대다수 ↘방향으로 흐른다. 후술할 내용처럼 공격 나가기 쉬운 지형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공격 받기도 쉽다는 뜻이다. 회남을 차지하는 순간 허, 여남, 초 등 예주, 연주의 주요 도시로부터 몰려오는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성공해야지만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이 맹공을 남형주 없이 오월 지방의 인력과 자원만으로 지켜낼 수 있을까? 북위가 '''형주를 소유하고 있는 남조'''의 회남을 점령하는데는 '''고작 33년'''이 소요되었다. 강릉을 점유하고 있었음에도 북조의 공격으로부터 쉽게 방어할 수 없었다. 남형주의 인력과 자원마저 없는 상황에서 회남을 지켜내기 위해선 결국 지휘관의 재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인재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배출될 수 있을까? 전국시대 초기의 [[위(전국시대)|위(魏)]]는 천하에 감히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이는 이회, [[서문표]], [[오기(전국시대)|오기]] 등의 인재와 [[위문후]]라는 걸출한 군주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문후, 서문표, 이회가 죽고 오기가 나라를 떠나게 되자 50년도 채 되지 않아 오기가 얻은 서하 땅을 전부 [[진(영성)|진(秦)]]에게 넘겨주었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제(춘추전국시대)|제(齊)]]가 가장 강력했다. 이는 [[제환공|환공]]과 [[관이오|관중]]이라는 걸출한 인재들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고 난 뒤 제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넓은 토지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강국으로 남기는 했지만 다시는 환공의 패업과 같은 업적을 이뤄내지 못하고 [[진(희성)|진(晉)]]한테 밀리는 2인자 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관중의 요지에 자리잡았으며 상앙의 변법으로 체제를 개혁한 진(秦)은 어땠는가? 소진이 이끄는 오국 합종군은 함곡관에서 격파되었다. 광장이 이끄는 제, 위, 한 삼국 합종군에게 함곡관이 점령당하고 황하 이동의 땅을 한과 위에게 돌려주며 굴욕적인 화친을 했으나 다시 일어났다. 신릉군이 합종군을 이끌고 몽오의 군대를 격파하고 함곡관까지 몰아붙였으나 합종군이 해산되자 다시 일어났다. 춘신군이 이끄는 합종군 역시 함곡관까지 몰려왔지만 해산되고 진은 다시 일어났다. 진나라는 언제나 함곡관에서 산동의 합종군을 막았다. 만약 진이 위나라의 하동 땅을 먼저 경략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을 나서 초나라의 남양을 차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양은 함곡관과 같은 요새로 막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소모전이 일어나고 한번 밀린다면 힘들게 얻은 남양 땅을 잃을 것이다. 장기적인 할거를 위해서는 뛰어난 장수에게 의존하기보단 방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손권과 여몽이 지속적으로 뛰어난 장수가 필요한 회남이 아닌 장강의 방어 시스템을 완성할 수 있는 강릉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회남이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핵심 지역은 맞다. 회수의 지류를 타고 예주, 연주, 서주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만으로 합비를 공격했어야 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조의 북벌인 환온의 북벌, 유유의 북벌, 원가북벌, 대통북벌 전부 남조가 '''최소 강릉은 소유하던 시점'''이라는 점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온의 북벌은 총 3차례 이루어졌는데 1차는 환온 본인은 강릉에서 출발하여 양양, 남향까지 올라가 관중을 노렸고 한중에서 자오곡을 따라 관중을 습격했다. 2차 역시 강릉에서 출발하여 완까지 북상한 후 낙양으로 들어갔다. 유유의 북벌 또한 회남 지역에서만 치고 올라간 것이 아니다. 양양, 회남, 팽성에서 별개로 출발한 것이 유유의 북벌이다. 이들의 북벌은 단순히 회남에서 치고 올라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강릉을 먹는 것보다 회남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손권이 회남을 먹었을 때의 판도인 오월+회남을 장악한 상태에서 시행한 북벌을 예시로 들어야 한다. 오월과 회남 뿐만 아니라 형초와 파촉까지 장악한 상태였던 남조의 북벌을 예시로 드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오월과 회남만을 장악한 사레는 전국시대 말기의 초나라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도 형초 지방에서 일어나 회남과 오월을 점령했으나 후에 형초 지방을 상실한 사례이지 오월에서 일어나 회남을 차지한 사례가 아니다. 게다가 초나라는 언영을 상실한 이후로 계속 내리막이었다. 정리하면 회남과 오월만을 든 상태에서 오월과 형초를 차지했던 손오 정권보다 '''더 잘 버틴 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위-오 간 분쟁이 주로 회남에 있었던 것은 단순히 회남이 더 중요해서가 아니다. 당시 강릉 주변에는 '''운몽택'''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습지가 존재했으며 강하와 무창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이 습지는 온갖 전염병의 근원으로 북방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실제로 조조는 208년에, 조비는 223년에 전염병에 크게 얻어 맞았다. 이러한 요소를 무시하고 단순히 회남 지역에서 전투가 많이 일어났으므로 회남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확증편향에 불과하다. 우선 양양 공방전을 예시로 드는 사람들이 망각하는 것이 당시 송나라는 '''강릉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주공방전에서 손권의 가능한 선택지는 회남과 남군 2개이지 양양이 아니다. 관우가 양양을 점령할 뻔했다고? 먼저 수몰된 번성을 점령하지도 못한 공성 실력으로 양양성을 점령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양양성이 자발적으로 항복해야 하는데 강건너에서 적군이 대패해 물에 빠져죽는 상황을 목격한 양양성의 수비병들이 과연 항복을 할까? 관우가 양양을 점령할 수 있었다 생각하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그리고 양양 공방전을 예시로 드는 것이 잘못된 것이 양양에서 벌어진 다른 전투들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장 십육국시대의 전진만 해도 양양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남송의 양양 공방전은 남송이 잘 막은 것이지 양양이 천하의 요충지라 버틸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물론 양양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인 것은 맞지만, 요충지라도 지키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제 역할을 할 수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삼국지만 보면 진창, 합비, 검각 이런 곳이 난공불략의 요새 같지만 실제로는 역사 속에서 손쉽게 점령당한 적이 더 많은 곳이다. 이궁지쟁과 고평릉사변이 비슷한 시기여서 오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공격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주장의 경우, 이궁지쟁은 생각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이궁지쟁은 오나라 내부에서 상위층 몇명만 날아간 사건이지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 사건이 결코 아니다. 당시 외정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특히 246년에는 주연이 조중을 공격해 큰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동흥제 전투는 이궁지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손권이 죽은 직후 벌어졌는데 오나라가 대승을 거뒀다. 형남의 물자는 직접 회남으로 투입한다기보다는 국가의 총 국력이 증가한다는 뜻이다. 형남과 강릉을 차지하면 그 지역만으로 어느정도 세력을 형성할 수 있고 이 말은 본거지 양주의 국력을 회남에 집중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남북조시대 동안 남조가 겪은 혼란은 오나라의 혼란보다 몇배는 치명적이었는데, 북조는 이 기회를 틈타 멸망시키지 못했다. 혼란스러울 때 침공 안 당해서 오래 유지했다기엔 남조 국가들은 오나라보다 훨씬 운이 좋았던 것이다. 사마소가 촉한을 공격한 이유는 오나라가 안정되어서가 아니다. 촉한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마소가 직접 '강유가 답중에 있고 한중이 비어있으니 공격할만 하다'라 말했다. 권력 강화가 따라온 것은 맞지만 개전 원인은 강유의 방어 전략 수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파촉의 백성들이 촉한을 그리워했다는 것은 근거없는 추측에 불과하며 종회의 난은 촉한 멸망 후 1년도 되지 않아서 종결된 사건이기 때문에 특별히 어수선해질 것은 없다. 독발수기능의 난 역시 이 때문에 오나라 공격이 늦춰졌다 말하기엔 독발수기능이 죽은 시점보다 오나라 정벌 시점이 더 이르다. 가충이 오나라 정벌을 반대했다고? 등애도 촉나라 정벌을 반대했다. 그리고 280년에 오나라 정벌 하기 전까지 오나라를 공격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당장 서릉 전투만 해도 육항이 성공적으로 방어해내지 못했으면 장강의 수로가 훤히 열리게 되는 상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